2012년 4월 20일 금요일

사진 보정을 알려주마 - 0

0. 들어가며

하나의 유령이 한때 한반도를 배회한 적이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라는 유령이. 아이폰과 갤럭시, 대화면 스마트폰과 구유럽의 각종 제조사들이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자유주의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동남아의 유수한 여행지에서 단박에 한국 여행자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퍼져나갔던 DSLR 유저들은 초소형 사진모듈 앞에 전율했으며, 너도나도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고 전화기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디지털카메라라는 유령은 이렇게 허무하게 퇴치되었고, 인민들은 스마트폰 사진으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갔답니다. 끝.

되도 않는 패러디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수년 전 우리나라에는 DSLR 돌풍이 일어났고, 누구나 멋진 사진을 찍을 꿈에 부풀었다. 수많은 사진 교본이 출판되었고, 온라인 사진동호회의 출사모임은 흥행가도를 이어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자신이 찍어내는 사진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진기들은 다시 장롱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스마트폰이 그 공백을 메워나갔다.
아마도 지금이 '디지털 사진 강좌'를 시작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부적절하다니까 왠지 구미가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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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밤길이 예뻐, 자전거 핸들을 삼각대 삼아 사진을 찍었다.
'봄이도다 밤이다' 사진을 감상하며 간단한 퀴즈를 함 풀어보자.
다음 중 색조 보정을 한 사진은 뭘까?



봄이도다 밤이다 1 




봄이도다 밤이다 2 



뭐는 2루수야.. 가 아니라, 정답은 두번째 사진이다.

설명을 좀 더 붙여보자면, 위 두 사진은 벚꽃과 개나리 우거진 밤길을 주황색 나트륨 등이 밝히고 있는 장면을 연달아 찍은 것이다.
첫번째 사진은 화이트밸런스를 자동으로 설정하고 찍은 사진이다. 꽃이고 잎이고 온통 주황 일색이다.
두번째는 도로에 그어진 흰 선을 기준으로 커스텀 화이트밸런스를 설정하고 찍었다. 결과적으로는 푸른 기가 많이 돈 것이, 화이트밸런스가 제대로 안 맞았나보다. 그래서 꽃과 잎이 그나마 자연색에 근접하도록 커브 보정을 해 주었다. Blue 채널의 중간 톤 밝기를 많이 낮춰 주고, Red와 Green채널의 중간톤 밝기를 조금씩 올렸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다시 한 번 물어보자, 1루수가 누구야? 아.. 미안타. 이 동영상을 너무 재밌게 봤는지 말이 자꾸 헛나온다.
다시 물어보자, 그럼 어느 사진이 더 좋은 사진일까? 

나트륨 가로등의 색상이 유사하게 표현된 첫번째 사진일까?
흰 벚꽃잎과 노란 개나리의 색이 그나마 사실적으로 찍힌 두번째 사진일까?
후보정을 많이 했다니 두번째 사진은 탈락일까?




봄이도다 밤이다 3 



나는 이 사진을 꼽겠다. 화이트밸런스가 잘못 측정되어 푸른기가 도는 사진지만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든다. 그래서 컨트라스트를 조금 높여 틀어진 색감을 더 강조했다. 기억 저편에 잠재되어있는 밤길의 정취가 이런 것 같기도 하다, 내 비록 삭막한 가로등 아래 밋밋한 아스팔트 길을 달리고 있지만.
파랑, 보라, 청록이 서로 잘 어우러지고, 어두운 톤과 밝은 톤이 적절하게 분포되어, 달빛 아래 고요한, 또는 새벽녘의 상쾌한 숲길을 거니는 환상이 느껴진다. 노출과 화이트밸런스를 정확하게 측정해서 찍었는지, 후보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사실 이런 건 좋은 사진을 가리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내 맘에 들면 그만 아닌가.

'어머, 근데 그게 어째서 사진이야? 상상화는 그림으로나 그리시지?'

그게 사진 맞다.  밤길의 파란 벚꽃 사진도 사진이고 불타는 연평도 사진도 사진이다. '벚꽃'이나 '연평도'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사진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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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사진 보정'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 할 사진에 감히 조작이 웬말이냐?' 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거다. 하지만 실은 '사진'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문제가 있다.

사진 寫眞 - 진실을 본뜬 것

무려 참 眞, 진실이라는 고상한 가치를 아무런 사심없이 있는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사진인 것이다. 사진이라는 문물을 처음 보고 번역어를 만들어내야 했을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의 문화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도 같다. 이미 지고지순한 사진인데 심지어 그것을 보정補正 - 바로잡는다니, 말도 안된다. 이는 조작의 영역이다!

그럼 이 단어를 함 보자, 포토 + 그래피

포톤캐논이 광자포니까 포토는 빛이고, 그래피티가 벽그림이니까 그래피는 그린다는 뜻이다. (Phos가 희랍어로 빛, Graphos는 그리다, Graffitti는 이태리어로 낙서.. 이런 재미없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점, 참고하라고 적어둔다-_-) 즉 화가는 붓으로 그리고, 낙서가들은 스프레이로 그리며, 사진가는 빛으로 그린다는 거다. 포토는 수단이고, 그래프는 그리는 사람 맘대로. 개인적으로 이런 무심한 단어 조합이 좋다.

강조하건대 사진이란, 객관이라는 허울을 쓰고 빈곤한 의도를 순수로 포장하는 따위의 나약한 매체가 결코 아니다. 빛이라는 붓으로 내 느낌과 의도를 적극적으로 표현해낸 이미지, 그것이 바로 사진, 아니 포토그래피란 말이다. 듣고 있나, 이 땅의 모든 기계적 중립주의자들아!
어, 갑자기 논조에 삑사리가 났다-_-;;
암튼 각설하고, 여차저차 해서 다음 시간 부터는 '사진 보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실은 수 년 전부터 지인들에게 손쉽게 던져 줄만한 사진 매뉴얼을 구상하고 있었다. 근데 사진 찍는 대목부터 시작하려니 다들 사진기 기종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같더라.
그래서 이번엔 사진 보정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핸드폰이든 똑딱이든 DSLR이든, 누구나 하드를 뒤져 보면 찍어놓은 사진들이 웬만큼 있지 않겠나. 다운 받은 사진밖에 없다고??-_-;; 암튼 우선 좋든 나쁘든 일단 찍어 놓은 사진부터 지지고 볶고 해도 썩 훌륭한 사진을 완성할 수 있다. 진짜다. 사진의 절반은 암실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사진 보정을 하다 보면 자신의 시각 취향을 돌아볼 수도 있고, 보정으로 불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찍는 방법의 탐구로 이어지고, 나아가 자신에게 필요한 사진 장비에 대해서도 감이 생길 거다.

그럼 다음 이시간에 뵙겠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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